깊이 보기 [2025.03~04] #1 어울려 살기를 꿈꾸는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화가 정은혜
화가로 일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지낸다. 함께 그리는 동료들이 있고, 소소한 일상을 나눌 친구가 있고, 늘 곁을 지키는 가족과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 선천적인 장애 탓에 몸이 약하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정은혜 작가는 지금 최고로 행복하다. 사회의 일원으로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한때 꿈이었던 바람이 비로소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가 발달장애인 예비신부, 정은혜
정은혜 작가는 꽤 성공한 화가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팬들이 생기면서 대만, 미국, 호주, 브라질 등 여러 나라로 전시 여행도 다니고 있다. 그중에는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응원하는 마음에 팬이 된 이들도 많다. 드라마의 유명세 덕에 길에서 알아보고 사인과 사진 촬영 요청을 받는 데도 익숙해졌고, 동생 은백 씨와 함께하는 유튜브 ‘니얼굴_은혜씨’는 구독자 21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니 그가 현재에 만족하는 것은 언뜻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정은혜 작가가 행복한 이유는 대단한 유명세보다 “좋아요, 멋져요”라고 말해주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동료들과 한 공간에 모여 월급 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일상에 있다.
“그림 그리기 전에는 외로웠지. 그림 그릴 때는 혼자 외롭기보다는 다같이 그리는 게 훨씬 나아요. 행복하니까. 돈도 벌고.”
정은혜 작가가 소속된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에는 중증 발달장애인 정은혜 작가를 비롯해 장애를 가진 작가 열 명이 소속되어 있다. 소속 작가들은 매일 출근해 그림을 그리고 월급을 받는 어엿한 예술 노동자다. 정은혜 작가는 지난해 포니정 영리더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을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 공간 마련에 모두 사용했는데, 동료들과 함께 일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만족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다 같이 그리는” 데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 작업하면서 ‘화가 정은혜’뿐 아니라 ‘여성 정은혜’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다.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 소속 조영남 작가와 1년 남짓 연애를 거쳐 결혼을 약속한 것이다. 정은혜 작가는 요즘 5월에 있을 결혼 생각에 푹 빠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결혼식이 끝나면 부부가 된 기념으로 2인전을 열기 위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명화를 재해석한 작품도 한창 작업 중이다. 예비신랑 조영남 작가는 표현은 서툴러도 오랜 기간 정은혜 작가를 지켜보고 세삼하게 챙기며 정성을 쏟아온 순정파란다. 알콩달콩한 두 사람의 모습에 10년을 함께해온 반려견 ‘지로’도 질투할 정도라고.
“그 오빠가 저를 좋아했어요. 아침마다 커피 줄 때 좋았어요. 오빠가 집에 와서 우리 둘이 있을 때 지로가 좀 샘 나 하는 거구나 했어요. 오빠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
장애인을 소외시키는 불편한 시선
화가로서 여성으로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요즘 정은혜 작가에게 힘든 일, 어려운 일, 기분 나쁜 일이 있는지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그런 거 없어요”다. 웬만한 악플쯤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여유도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게도 세상의 편견과 외면 속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있었다. 정은혜 작가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해 왔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는 어머니 장차현실 씨는 그 시간을 아프도록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디든 다니게 하고 싶어서 직업교육을 받는 학교에 보냈는데, 양평 집에서 학교가 있는 청평까지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몇 년 동안 너무 많은 시선을 받았어요. 은혜처럼 다운증후군이 있으면 외모부터가 다르니까, ‘왜 저렇게 생겼나’ ‘왜 저런 사람이 여기 있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의 의미를 은혜도 고스란히 느끼고 상처를 많이 받았죠.”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던 정은혜 작가는 차갑게 밀어내기만 하는 시선들에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으면서 강박적인 증상들도 나타났다.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힘들었어요. 시선강박증이나 조현병도 오고. 이 가는 거, 말 더듬는 거. 매일매일 집에서 뜨개질만 하면서. 갈 데도 없었고, 휴대폰이 있었는데 전화가 올 데도 걸 데도 없었어요.”
끝이 없을 것 같던 외로운 시간은 장차현실 씨가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화실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혼자 집에서 우울해할 딸이 걱정스러워 청소나 뒷정리를 해주면 약간의 월급을 주기로 한 것인데, 놀랍게도 그때까지 정은혜 작가는 그림을 그린 경험이 전혀 없었다.
“화실에서 애들이 그림도 그리면서 데생도 하면서, 그걸 보면서 샘이 나서 저도 끼어서 그림을 그렸어요. 2013년 2월 27일에.”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할 만큼, 그날은 정은혜 작가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술을 전공하고 만화가로 활동했던 장차현실 씨는 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화실 안에 작업실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연예인 사진을 보고 그렸지만 곧 친구나 지인들의 얼굴을 그려 주기 시작했다. 그림을 받고 감탄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정은혜 작가의 강방증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장차현실 씨는 외로움 타고 사람 좋아하는 딸을 위해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자고 생각했다. 문호리 리버마켓의 캐리커처 작가 ‘니얼굴 은혜씨’의 시작이었다.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가 있는 삶
캐리커처가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으면서 정은혜 작가는 1년 만에 1,000명, 지금까지 무려 5,000명의 얼굴을 그렸다. 많은 사람이 찾아주는 만큼 누구보다 성실하게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숫자였다.
“처음에 2016년 8월에, 그때 더웠어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계속 그렸어요. 그때는 뭐 종기가 아물고 터지고. 겨울에도 눈이 와도 계속 그렸어요. 바람이 불거나 태풍이 몰아쳐도 계속 열리고 있었죠. 사람들이 좋아요, 멋져요, 저를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요.”
날씨가 궂으면 가족들은 하루 쉬자고 말렸지만, 정은혜 작가는 “사람들이 날 기다려”라며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손님이 없으면 그런 대로, 동료 셀러들이 있어 즐거웠다. 팔려고 가져온 고기며 채소를 구워 먹으며 어울리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는 법도 배웠으니, 그곳에서의 힘들고 즐거웠던 모든 순간이 정은혜 작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다. 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의 그림 안에는 분명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느꼈던 행복한 마음이 담겨 있겠다 싶어 “무슨 생각을 하며 그리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아무 생각도 고민도 안 한다.” 혹시 그리는 게 힘들 때는 없는지 물으니 “항상 힘이 나요. 밥이나 커피나 그림이나 힘나요”란다.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힘을 얻고 행복을 찾은 정은혜 작가의 존재는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 동료들을 비롯한 장애인들에게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이 되고 있다. 장차현실 씨는 화가 정은혜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 역시, 중증 발달장애인도 자신만의 삶을 찾고 꾸려나갈 수 있다는 선례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여성 발달장애인을 키우는 부모들은 세상에 내보내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저 역시 그랬고요. 생각해 보면 들려오는 것은 온통 흉흉한 얘기뿐이고, 여성 장애인이 건강한 성 역할을 하는 사례는 너무 드물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은혜가 스스로 상대를 골라 연애하고 결혼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계속 응원해 주려고 해요. 꼭 대단한 성공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서툴면 서툰 대로 사회의 도움도 받으면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장애인이 은혜 말고도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글 | 김수영
사진 | 전재천